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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 마을 통곡의 날

11,181 2008.02.0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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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2일

고요하던 바다. 언제보아도 푸른 속초 앞바다. 그러나 겨울 바다는 언제 변덕부릴지 아무도 모른다. 겨울에 어민들은 명태잡이를 나간다. 새벽 3시경에 출어 준비해서 4시까지 콩볶듯이 바다로 나간다. 출어시간과 작업시간이 짧은 해와 맞추어 서둘러야하기에 그렇게 나가는가 보다. 그날 새벽도 외삼촌 3명은 부둣가 곁인 우리 집에 모여 명태잡이 작전회의를 한다. 정보교환이다. 명태가 잘 잡히는 코스는 어디며 수심은 얼마이며 시간대, 물흐름 등등... 그래서 항상 실적 왕, 일등 어부들이다. 각각 다른 배의 선장인 외삼촌들은 흥남부두 철수 때 고향을 놔두고 온 실향민, 아바이 마을의 엄마 혈육들이다. 우리 집은 혼자 사는 우리 엄마, 누나에게 출어보고, 아니 눈도장을 찍고, 바다로 나가고, 들어 와서는 바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장소이자 쉼터이다. 조카들의 잠과 인격은 염두에도 없고... 외삼촌들의 떠드는 소리에 이불을 꼭 뒤집어쓰고 빨리 출어하기만 기다린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바다에서 바람이 몹시 불었다. 소위 파도를 일으키는 동풍, 샛바람이다. 그런데 10시가 넘으니 더욱 불었다. 파도가 부서져 하안물결만이 보였다. 배들이 콩볶듯이 다투어 항구로 되들어온다. 던진 주낙을 다 버린 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오늘 같은 날은 육지에서의 낙시 보조작업 즉 미끼를 달고 낙시를 개는 6-7시간의 품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계수단이지만 우리 식구는 더할 나위없는 휴식의 날이고 잠을 실컷 자는 날, 마음의 잔치 날이다.

그런데 낮 12시쯤 되니까 동네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을 친다. 배가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속초 앞바다에는 여러 곳에 암초가 있다. 그 암초 옆을 지나야만 항구로 들어오는데 그 암초는 파도의 높이를 가름하는 척도이다. 높으면 하얗게 부서진다. 그런데 오늘은 보통 큰 파도가 아니다. 하얀 물결만 보이고 바다는 온통 부서진 파도 일색이다. ‘퍼펙트 스톰’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첫 번째 뒤집힌 배위에 서너명의 사람들이 간신히 배를 붙잡고 손을 흔들며 구명을 요청하고 있다. 누구 하나 손을 쓸 수가 없다. 지금처럼 해난구조가 잘된 것도 아니다. 헬기도 없다. 아니 악천후 때문에 구조할 수 없을 것이다. 방파제 위로 구경꾼들이 발을 동동 구른다. 왜냐하면 다 내 남편, 아버지 친척들이기 때문이다. 울며 고함치는 사람들도 파도가 너무 세게 몰려와서 방파제 위에도 설 수 없었다. 마치 공설운동장에 모인 구경꾼 같지만 그들의 죽음의 현장을 생중계 하듯 바라 보기만 했다. 2번째 배가 넘어졌다. 3번째...간신히 파도 주기를 잘 탄 배는 이리비틀 저리비틀 거리다가 항구 앞 등대를 돌아 들어온다. 평균 4-5척당 1척 주기로 뒤집혀 진다. 어떤 때는 파도 방향으로 배를 돌려도 그 배의 전장 10여미터가 꽂꽂이 선 채로 뒤집힌다. 아연실색 그 자체이다. 10척.. 15척...누구 좀 저 불쌍한 어부들을 살려 주소.... 뒤에는 연달아 오는 수백 척의 배들이 파도와 생명의 곡예를 하면서 들어오고 있다. 살려고 노력하는 가련한 어부들, 파르르 손을 떨며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저들... 사회의 구조 속에 밀려나 배를 탔든지, 가난이 물려준 대물림을 했든지 어쨌든 불쌍한 저들은 죽어간다. 배 한 척에는 약 5-6명의 인원이 탄다. 선장, 기관장, 간판장, 그리고 일꾼 2, 3명이 탄다. 그날 기억으로는 저녁까지 24척. 100여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바닷가에 시체가 떠 다닌다. 뒤집힌 배를 간신히 붙잡고 약 1킬로미터 떠밀려와도 육지 방파제까지 오면 그들의 운명은 끝이다. 방파제에 부딪히는 순간 다 죽는 것이다. 파리 목숨이다. 비옷을 입고 뒤집혀진 배의 키를 붙잡고 살려 달라는 애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뱃놈, 우라질 놈의 운명, 고기를 잡아 먹고 사는 것이 무슨 죄가 된다고... 그러기에 자녀들은 배를 타지 말아야 하는데 또 배운 짓이 이것이니 이 가난의 굴레를 어찌 피하랴.


외숙모들이 전부 모였다. 그 조카들도 ,형, 누나들 다 우리 집에 집결했다. 20여 명이 족히 되리라. 우리 엄마는 눈물범벅, 대성통곡이다. 6.25 전쟁터에서 겨우 살아남은 동생들을 10여년 만에 바다에서 다 죽여야 하는 이 순간, 외숙모도 울고 그 자녀들도. 다 대성 통곡... 이 날 청호동 아바이 마을은 통곡의 날이었다. 다음 날에도 외삼촌의 행방은 모연했다. 일단 저녁까지 집에 오지 않았기에 그 파도에 희생되었다고 보았다. 외삼춘 3명은 그날 저녁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오지 않았다. 살아 남았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3일이 지난 날 아침녁 파도가 좀 낮아졌다. 바람이 자면 파도도 낮아진다. 바닷가 백사장에는 죽은 시체를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붐볐고 확인한 사람들과 식구들은 그야말로 통곡의 날들이었다.

우리 집 식구들도 행여나 하고 바닷가로 나갔지만 통곡하는 사람들의 소리만 들을 뿐이다. 외삼촌들의 배가 넘어진 흔적이 없기 때문에 실낫 같은 기대도 걸었다. 그런데 12시쯤 수평선에 배 한척이 들어오는 것이다.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이 큰 외삼촌의 배이다. 그리고 두세 시간 후에 둘째, 저녁 해질 무렵에 막내 외삼촌까지 다 들어온 것이다. 그 감격은 온 식구들의 환희였다. 죽었던 사람이 돌아온 것이다. 또 외삼촌 3명이 우리 집에 다 모였다. 그리고 경험담, 무용담을 한다. 그들이 살아 남은 것은 바다에서 오래 짠 물을 먹은 경험이었다. 자고 있는 육군병장이 깨어 있는 일병보다 낫다고나 할까. 그 경험은 파도를 등지고 육지로 들어오면 꺽는 파도에 배가 뒤집힌다는 것이다. 외삼촌들도 항구쪽으로 들어오다가 배들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파도를 향해 2. 3일간 일본쪽으로 전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온 것이다. 3일간 고생은 얼마나 했을까?

우리 형은 이 광경을 보고 평생 배를 타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환경과 여건은 자기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훗날 내가 난파선에서 하늘을 향해 살려달라고 했을 때였다.

댓글목록

동문님의 댓글

동문 이름으로 검색 2008.02.02 00:00

생생한 글이네요! 참 많은 분들이 저 세상으로 갔어요<BR>배 고품 때문에 어쩔수 없이 바다와 씨름할 수 밖에 없었던  아픈 시절 이었어요<BR>이제 우리들이 힘을 모아 청호동 아바이마을을 널리 알려 많은 관광객들이 우리마을을 방문하게 노력하여 ..<BR>우리들이 사랑하는  자식들에게는  좋은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BR>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들이 쓴소리를 할줄아는 어른이 되어야 하며<BR>나쁜것은 나쁘고 좋은것은 좋다는 표현을 해야 함에도 먼산만 바라보고 있어요, 내가 아니더라도 누가 하겠지 ..<BR>우리마을 주변에 많은 공사로 주민의 피해가 엄청 있으매도 그저 사람들만 좋아서 누가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없어 엉청 슬픔니다 ... <BR>동문들이 힘을모아 아바이마을의 발전을 위해 ... 위하여 ...

갯배님의 댓글

갯배 이름으로 검색 2008.02.04 00:00

한편의 영화 같습니다.<BR>그래서 다른 마을보다 우리마을에는 홀로 되신 어머니들이 많은것 같습니다.<BR>정말로 너무 고생 많으신 우리 어르신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마을은<BR>우리가 힘을 합쳐 살기좋은 마을이 되었으면 합니다.<BR>삼가 조의를 빕니다.<BR>

전영택(6님의 댓글

상기글의 1963년은 1962년으로 정정합니다. - 글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