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눈물로 이룬 만학 - 방송통신대학

10,242 2013.12.3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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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꿈에 그리던 대학을 포기하였다. 군에서 제대하고 잠시 배를 타다가 공부하려 했지만 장소가 없어 교회로 들어갔다. 그러나 웬일인지 공부보다는 봉사할 일이 많아졌다. 교도소에서 매맞은 후유증으로 시달리던 어느 여름날 가슴에 뜨거운 불을 체험했다. 푸르스런 멍, 썩어가는 부분이 다 나아지는 것이다. 이성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 내 몸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나머지 공부도 포기하고 교회에서 7년간을 미친 듯이 아니 미쳐서 일을 했다. 새벽 종치는 일부터 마당청소, 걸래질, 모든 잡일은 다 했다. 어린이, 학생 가르치는 일, 개척하는 일 겨울 전에 수백 니어커로 톱밥을 실어 나르면서 창고에 저장하는 일 등... 돈 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일로...

    그 중에 꽃밭도 잘 가꾸었다. 원래 엄마가 꽃을 좋아하고 잘 기르는데 나도 그러했다. 계절마다 피는 꽃을 심었다.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피는 여러 가지 꽃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출 정도로 성의껏 가꾸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누가 보아도 좋을 많큼 심고 가꾸었다.

  그렇게 교회에서 열심히 남이 알아주던지 몰라주던지 나름대로 일했다.
교회가 열악하다보니 전도사를 두지 못해서 어린이 부서와 중고등부를 전부맡아서 설교하고 가르쳤다. 열심 하나 가지고 가르쳤다. 토요일은 학생들을  설교하고 분반공부하고 기도생활을 지도하였다.

  어느 토요일 학생들을 상대로 설교를 했다. 그런데 남학생 한명이 제일 뒷자리에서 그렇게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나도 어디에서 나온 근거인지 모르지만 “자살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자살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깁니다. 자살할 용기로 오히려 살아야 합니다. ‘자살’을 꺼꾸러 말하면 ‘살자’입니다.”
열변을 토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게한 것이다.
  예배가 끝나고 학생들이 다 집에 갔는데 처음 온 그 학생이 남아서 계속 울었다. 나도 남아 그 학생이 다 울고 난 다음 면담했다.
    “학생, 왜 울어 무슨 사연이 있어? ”
한참을 흐느끼던 학생이 그 사연을 말했다. 주머니에서 많은 약을 내 놓고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그 약은 수면제였다. 자기는 신포마을 경복호집 둘째 아들인데 첩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집에서 큰 엄마의 핍박이 너무 심해서 바다에 빠져 자살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시내 여러 약국에서 수면제를 한 두 알씩 모아서 오늘 먹고 바다에 빠져 죽으려는 D-Day이었다. 정처없이 가다가 교회에 불이 켜져서 죽기 전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나의 설교를 듣고 용기를 가지고 죽기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후 무명의 설교자이지만 사람 하나 살린 보람으로 그 일을 계속했다. 학생들을 뜨겁게 기도 시켰다. 통성기도로... 시끄럽고 왁자지껄.... 저렇게 해야 하나님이 들어주시나? 할 정도로....

  그런데 이 열심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당시 우리 젊은 담임목사는 예리한 엘리트였다. 한양공대를 졸업하고 신학을 다시 공부하여 목사가 된 학구파였다.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 30살에 우리교회에 첫 부임하여 4년째 목회를 하고 계셨다. 
  예배 후 학생들을 뜨겁게 기도시키는 중에 목사님이 사택에서 교회로 들어왔다. 큰소리로 “야, 전 선생! 네가 지금 기독교를 무당으로 만들고 있느냐?”
  기도하다 말고 눈을 떴다. 서슬이 퍼렇게 된 얼굴로 다가와서 나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는 또 다시 폭언을 했다. “야 무식한 놈아 고등학교 밖에 안 나오니 학생들을 이렇게 가르치지, 바르게 배워서 하란 말이야 ..... 학생들을 데리고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무당을 만들고 있단 말이야... 하나님이 귀가 먹어 이렇게 소리를 내어 기도해야만 듣느냐?” 하면서 계속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당시 권병기 청년이 학생 보조로 있다가 기겁하고 목사님을 말렸다. “목사님 말로 하세요, 이렇게 폭력을 쓰면 안 되지요... 30명의 학생들이 보고 있잖아요...” 어이없고 기가 막혔다. 실망도 컸다.
  한편 목사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도 되었다. 이웃에서 떠들며 기도한다(통성기도)고 여러 차례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벼르다가 폭발한 것이다. 방법이 잘못 되었다. 약자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상처를 받을 때는 머리가 좋아진다고 한다. 여자들은 남자에게 상처받을 때 그 아이큐가 배가 증가하는데, 토씨하나, 표정하나 잊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가? 또 상처를 주는 사람은 머리가 나빠져 자기가 한 것을 기억 못하니 그것도 신비 중에 신비이다. 훗날 이 일로 인하여 목사님이 다른 교회로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날 나는 실컷 울었다. 학생들 앞에 쪽 팔려 울고, 못 배워 서러워 울고, 목사님의 인격이 실망스러워 울고.... 더 운 것은 집에서 미친놈 듣고도 예수님이 좋아서 일하는 것인데....  할 일 없어 온 것처럼 취급당해서 서러워 울고.....,  울배가 울음보 터져서 울고.....
 
 그렇게 교회 일에 브레이크가 걸리니 승승장구하던 신앙과 내 자신에 대하여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는 어느 날 초등교사로 갓 부임한 친구 승범이가 이런 말을 했다.
  “야 교회 봉사도 좋지만 젊은 날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네 앞날을 챙겨    야 하지 않느냐? 왜 못 배웠다고 서러움을 받느냐? 너는 할 수 있지 않    니? 안 해서 그렇지 못해서가 아니지 않니? 
  “요즈음 방송통신대학이라는 제도도 있더라. 네 고등학교 성적이면 충분      히 학교에 합격하니 입학원서를 넣어 보라. 제발 내 말 좀 들어....”
충심어린 친구의 조언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때가 아니다. 거기는 출석수업도 있다는데 새벽예배 종은 누가
    치고, 교회 허드렛일은 누가하고....” 지금 생각하면 교만이었다. 그후에도 나는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했다. 그러나 승범이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학교에 가서 성적증명서와 함께 원서를 써서 방송대학에 원서를 내었다. 오랜 만에 집에 가니 편지 한통이 왔다. 다름이 아니라 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또 떠밀려 공부하게 된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외숙모가 강제로 손잡고 가서 입학시켜 주었고, 중학교 때는 조순환 선생님이, 고등학교 때는 박재앙 선생님이... 그리고 대학은 친구의 손에 의하여....
   
  기왕에 입학한 것, 지난 번 멱살 쇼크도 있었고.... 잘 해보자고 강심을 먹고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공부했다. 행정학과는 3000명 입학하여 300명 졸업한다고 한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졸업을 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내서 방송을 듣고, 출석수업을 하고, 중간시험과 기말 시험을 봐서 성적을 내야 졸업이 된다. 

    첫 출석수업을 했다. 강원대학이었다. 80년대 초, 광주 민주화 운동 후 체육관 대통령인 전두환 정부가 강원대 정문 입구에 탱크를 세워 놓았다. 별로 의식이 없던 때라 탱크도 덤덤했다. 그 동안 봉사만 하느라고 출석수업에 갈 돈도 없었다. 누나에게 어렵사리 돈 만원을 꾸었다. 언제 갚을지 모르지만..... 12일을 보내야 하는데 적은 돈으로 차비를 제하고 나면 밥값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잠은 같은 교단 소속인 춘천에 있는 교동교회에서 자기로 했다. 당시 나이든 담임 목사님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니 가난한 통신대 생에게 교회 방 하나를 내어주었다. 자면서 공부하면서..... 새벽에는 물론 그 교회에 나가고.... 먹는 문제까지 목사님께 민폐를 끼칠 수 없었다. 그래도 목사님이 가끔 밥을 주었다.
    남은 돈은 올 차비를 남기고 5,000원이었다. 낮에는 대충 굶어도 저녁 한 끼만은 해결했어야 하는데 10일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교회 주변에 싼 밥집이 있는가 하고 돌아보니 ‘순대국’ 집이 있었다. 한 끼 먹어보니 푸짐하게 주었다. 그런데 한 그릇 당 600원이었다. 그래서 사정을 했다. 내가 매일 순대국을 한 끼씩 저녁에 먹으려 오겠으니 그릇 당 500원씩 하고 5,000원에 10끼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일시불로 5,000원을 다 주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처음 몇 끼는 그런대로 먹었다.  5일 5끼를 먹고 나니 목에서 순대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공부하면서 공복인대도 순대국 냄새가 났다. 6번째는 그 집 앞에서 몇 번이고 망설였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고 들어갔고, 7번째는 더 돌고, 8번째는 그 근처에 가기도 싫었다. 9끼 째는 굶더라도 가지 않았다.
  다행히 그 날은 목사님이 저녁을 먹으라고 해서 살았다. 마지막 날 아침 시험을 치는 날이었다. 든든히 먹어야 시험을 칠 것 같아서 억지로 용기를 내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가서 먹었다. 남의 속도 모르게 식당 아줌마는 “총각! 순대국을 참 좋아 하는구먼”
속으로 “미치지 내가....” 시험이 끝나고 집에 올 동안 허기지면 차에서 처질 것 같아서.... 아니 본전 생각이 나서 오기로 마지막 한 끼를 눈물로 먹었다.

 그 맛있는 순대국이 그 놈의 순대국으로 바뀌기는 그 날 이후 부터였다.     
그렇게 공부한 방송통신대학이 나중 신학교 2학년 편입의 길을 가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이야 하나님만이 아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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