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아바이마을(신포마을)

10,546 2008.06.08 22:41

본문

‘아바이 마을’ 하면 신포마을이다. 어려서는 왜 청호동 갯배근처가 신포마을인지 몰랐다. 남들이 부르니 그렇게 알고 자랐다. 미국과 남한이 핵무기 회담의 결과로 북한에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준다고 하다가 미완성으로 끝난 곳이 바로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인 것이다.
   그곳과 아바이 마을의 한 부분인 신포마을은 무슨 연관이 있는가? 있다. 그것은 6.25 전쟁당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군이 북진했다가 압록강에서 중공군에 밀려 후퇴를 하다가 동해안으로 방향을 틀어 철수 한 곳이 흥남부두이다. 이곳은 북청의 신포마을과 멀지 않았고 그때 북한의 피난민들이, 특히 북청군의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난리를 피해 철수하는 흥남부두에서 사력을 다해 철수하는 군함을 타고 온 것이다. 더러는 고기잡는 목선을 타고 내려왔으며, 나도 흥남부두의 마지막 군함을 엄마 뱃속에서 함께 타고 왔다. 만삭인 우리 엄마가 남산만한 배를 움켜잡고 우리 누나 둘과 형을 데리고 억척스럽게 군함에 올랐으며 포로 수용소가 있는 거제도에서 나를 낳았다. 나는 생산지가 북한이고 뱃속에서 포성을 듣고 자랐으며, 낳기는 남한 거제도에서 났으니 어려운 시대에 천운을 타고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몇 번 죽을 고비가 있어도 지금껏 억척스럽게 살아온 모양이다.
 
   속초시 청호동의 속칭 '아바이 마을'은 6·25 전쟁 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일제시대에는 백사장으로 어구(漁具)를 올려 놓고, 창고 한 둘 있을 정도의 백사장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후퇴 당시 함경도에서 남쪽으로 피난 왔다가 휴전이 되면서 실향민들이 고향이 가까운 속초에 모여 통일이 되면 북으로 올라가기 위해 모인 곳이다. 마침 임자없는 빈터가 모래 백사장이고 바다가 가깝고 항구의 여건을 갗추니 고기를 잡기 위해서라도 여기저기서 실향민들이 모여 들었다.
 
   어르신, 내지 할아버지를 지칭하는 '아바이'를 따서 청호동 전체를 아바이 마을이라고 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북에서 기왕이면 같이 살았던 사람끼리 살았다. 살던 지명을 따라 나룻배를 중심하여 아랫 동네에는 신포마을, 앵고치마을, 짜꼬치마을, 양도마을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나룻배 윗쪽 청호초등학교 방향으로 신창마을, 정평마을, 홍원마을, 단천마을, 영흥마을, 이원마을과 그밖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또 청호초등학교 근처에 미군의 임시 비행장과 군단이 있었다고 해서 군단이라고도 했다. 당시 어획물(주로 명태, 오징어, 꽁치, 도루묵 등)이 풍부하여 남쪽에서 원정어업을 온 경상도 통영사람들도 가끔 섞여 살고 있었다.
 
  우리는 나룻배 아래 신포마을, 앵고치 마을, 짜고치 마을, 양도마을 사람들이 사는 짜고치 마을에 살았다. 함경도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바닷가 출신인 이 사람들은 서로 잘 싸웠고, 출신지 별로 서로 패싸움을 하는 경우가 잦다. 고향 잃은 설음, 가난에 찌든 생활, 기한없는 기다림, 한이 서린 울분, 이산가족에 대한 그리움, 급하게 만들어진 가정들, 죽은 줄 알고 재혼했다가 살아와서 시달림 받는 가정, 아이들의 아버지가 다르고 엄마가 다르고, 부부간의 나이 차이가 기상천외한 가정들. ‘하꼬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마치 돌섶에 따개비가 붙은 것 같았다. 전쟁 이후에 난 베이비 붐은 어린이들이 한마디로 떼로 몰려 다니게 했다. 놀이터는 백사장과 축항이고 나룻배 사이 항구의 길목은 어린이 수영장, 다이빙장이었다.
 
   우리 동창 중 아랫마을에는 방파제 끝쪽으로부터 김왈빈, 이만진, 김무광, 최봉주, 김두섭, 최철환, 신길용, 이상우, 전영택, 김남철, 김상희, 박희숙, 김기옥, 전송월... 중간 마을에는 김철수, 김칠성돌, 박이남, 김경우, 한인석, 양승범, 양봉자, 이순녀.. 학교 근처에는 마학모, 최영찬, 임해룡, 엄흥수, 황금득, 정미택 등... 조선소 근처에는 박재욱, 이영희도 살았다. 골목이 좁다시피 철없이 뛰어 다녔다.
특히 청호동 신포마을, 앵고치, 짜고치 마을은 미로(迷路)이다. 외지 사람이 한번 들어오면 길을 못 찾아 여러 번 헤메이다가 겨우 출구를 찾는다. 우리는 나면서 보았기에 이 골목 저 골목 잘 뛰어 다니고, 술래잡기를 하면 숨을 곳이 충분한 동네였다. 골목이 진창이라도 불평없고,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 공중화장실이라도, 그 ◎◎이 넘쳐나도 불평없고, 그래도 스트레스 해소는 싸워가면서, 서로 돕고 경쟁하면서 살았기에 잘 풀린다. 함경도 아바이들은 대체로 뒷끝이 없다. 즉흥적이다.
 
   투박하고 싸울 듯한 함경도 사투리는 정(靜)적 언어보다는 동(動)적 언어이다. 주어보다는 동사가 먼저 나오고, 수식어 보다는 목적어가 먼저 나온다. 그야말로 이 동네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 지녔고 사회적 불안요소를 다 품은 곳이라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했다.
함경도 사투리는 엑센트 때문에 여럿이 말할 때는 언제나 싸우는 것 같다. 경상도 부산 사람들이나 전라도 목포 사람들도 비슷하다. 바닷가의 사람들의 특징적인 말투이다. 나도 어려서 배운 이 사투리로 때문에 오해를 받거나 손해 보는 때가 많았다. 내 마누라는 지금도 내가 우리 애들을 향하여 ‘이 간나 새끼, 이 간나’  반찬투정하는 아들을보고 ‘배떼지기가 불러서...’라고하면 괴변(怪變)으로 여긴다. ‘무식이 철철 넘친다, 상스럽다, 출신이 의심스럽다’... 잔소리가 소나기처럼 내린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우리들은 그 말이 애칭인데도... 문화적 차이가 이렇게 심하니.....
아내에게 정감 가는 말을 지금도 못한다. 어쩌다가 마음먹고하면 해놓고도 내가 먼저 닭살이 돋으니 어찌 원만한 대화가 이루어지는가? 지금 생각하니 살붙여 살아 주는 것도 고맙지, 젊어서는 꽤나 씩씩 댔는데 어느 날 꼬리가 내려지는 것을 보면 곰국 끓여주고 도망갈까 염려되는 나이가 됐는가 봐. 출신 환경을 무시 못한다. 군에 가서야 속초를 벗어났다. 서울로 왔는데 처음 서울 말씨를 쓰는 아가씨들을 보고 닭살이 돋다 못해 맘이 녹아 내려 졸도할 뻔 했다. 어쩌면 그렇게 말씨가 고운지....
 
   음식점에 가면 지금도 나를 연변에서 온 교포인줄 알고 있다. 그래도 이 사투리 때문에 크게 힛트를 친 적이 있었다. 중국을 통해서 백두산을 단체여행을 갔다. ’96년 당시에는 중국이 개방된지 얼마 되지 않아 검문이 심하였고 돈도 은근히 요구하고 시비도 많았다. 백두산 쪽에는 검문하는 사람이 연변사람이었다. 올라와서는 ‘이봅세, 증맹세를 봅세’. 남한에서 온 사람들은 알아 듣지 못한다. 검문하는 조선족은 신이나서 주의사항과 금기사항을 말하는데 일행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각본에도 없는 통역을 했다. ‘여보세요 신분증을 봅시다’라는 뜻이라고... 그후 나는 그 날 검문소마다 통역관이 되었다. 마지막 인사는 내가 했다. ‘이거 봅세 수고했슴매, 잘 갑세’ 힐끈 처다보는 검문 자의 모습이 ‘아마 북에서 남파된 요원’으로 오해했을 것 같았다. 같이 간 일행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검문소를 한참 지난 후 버스 안에서 함경도 사투리 앙콜 공연을 다시 요청받기도 했다. 아바이 마을 주민들은 통일 후 돌아갈 고향 생각에 거친 바다를 생계터전으로 고기잡이와 배사업 등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억척같이 살아 나갔다. 고랑대(소나무 기둥)를 세워 그 사이사이에 줄을 걸어 건조시키는 오징어 덕장과 나무를 엮어 눈범벅의 명태덕장에서 코를 얼려가면서 돈을 번다. 통일이 되면 북에서 투자하려고 현찰로 모은다. 은행도 이용하지 하지않고 집에 꼭꼭 숨겨둔다. 세월이 지나갈수록, 통일이 늦어지자 더욱 초조해지고, 고향을 그리던 사람들이 홍수처럼 세월의 파도에 떠밀려 간다.
 
   청호동 아바이들은 반공(反共) 이야기만 나오면 제일 흥분하고, 여당의 일등 표밭은 항상 청호동이다. 정부에서는 관제데모(궐기대회, 납북어선 귀환 성토대회)에 청호동 사람들을 앞세운다. 반공정신이 투철하니까... 아바이마을 사람들은 부동산을 할 줄 모른다. 고기를 잡아 넉넉해지면 술집 내지 영화구경, 좀 깬 사람은 배를 사모아 늘리는 것이 낙이었다. 그래서 우악스럽게 배를 늘리는데 1호 2호... 5호.. 그것이 부의 상징이자 아바이 세계의 권위였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소금 찍어먹고 모은 배는 파도란 놈이 와서 심술을 부리고 시기하여 몽땅 바다에 밀어 넣기도 한다. 왜 그 당시 벌이가 될 때 조양동 빈터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학사평 1원짜리 땅은 어떻구....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으면 대박인줄 알지만 객지에 땅을 사둘 맘이 없었고, 이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옛 마을의 모습은 정말로 무질서 그 자체이지만 같은 공동의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 동병상린의 마음으로 산다. 삶이란 참으로 모진가 보다. 어느날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남아공의 빈민촌 모습을 보면서 옛날 아바이 마을이 생각났고, 몇 년 전 캄보디아에 가서 선상생활을 하는 빈민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나 감사한가, 얼마나 나아졌는가, 바로 저 모습이 우리였는데... 잠간 잊어버린 과거 아바이마을로 타임머신을 타게 했다.
    아쉬운 것은 개발이라는 구실 아래 그 옛 모습이 점차 사라진다는 것이다. 각 골목, 옹기종기 옆집 숨소리까지 들리는 피난민 오막살이 집들, 미군들이 버린 깡통을 주어서 거북선처럼 비늘을 붙인 집은 어떻고, 전쟁 중 깨진 함대 옆구리를 뜯어서 벽을 만든 기술은 어떤가? 필리핀 사람들이 미군의 짚차를 개조해 지푸니를 만들어 타고 다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가난한 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불편할 뿐이지만 무소유로 오는 기쁨이 있다. 버릴 것 하나 없다. 다 생활도구였다. 아바이 마을을 개발하지 않고 그 모습대로 보존했다면 지금처럼 지방 자치단체들이 각 지역 이익을 위해 관광사업 브랜드를 이룬 것처럼 좋은 소재였을 것인데.... 당시를 복원한다면 나도 한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960년대 아바이 마을 인구는 1962년 6852명에서 1968년 7526명으로 늘다가, 1997년 3398명으로 30년 만에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1998년 소규모 동 통폐합으로 조양동 일부 인구가 통합되면서 6080명으로 다시 늘어났지만 1세대는 계속 준다. 지금은 청호동 노인회 소속 167명 중 20~30% 정도만 1세대이다. 마을의 모습도 변했다. 바닷 바람에 견디기 위한 낮은 지붕에 어른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던 동해안 어촌의 전형적인 모습은 이제 아바이 마을 끝자락에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도로가 새로 놓이고 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서고 다리가 육지로 연결되면서 도시적인 분위기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주민들의 억센 함경도 사투리와, 통일 염원만이 아바이 마을임을 알려준다. 해아래 새 것이 어디 있는가?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한 시대의 아픔은 훗날 있었다는 사실일 뿐, 같은 세대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 같을까? 오늘도 청초호에 긴 울산바위의 모습을 드리운 저녁놀이 지는가 보다.  

댓글목록

12회님의 댓글

12회 이름으로 검색 2008.06.09 00:00

그리운 글 많이 올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BR>옛날 생각 많이 납니다<BR>형님께서 올려주신 이글이 아바이 마을의 역사 입니다<BR>아바이마을 향수를 느낄 수 잇도록 계속 ...<BR>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