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초딩추억시리즈25-명태가 흉년이던 해 이야기

6,319 2010.06.27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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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는 겨울에 나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다. 여름철에 잡힌다고 상상하면 어떻게 될까? 어판장은 명태 썩는 냄새로 진동할 것이다. 냉동이 잘 안되던 그 시대에는 거의 다 썩어 상품이 되지 못해서 버렸을 것이다. 건조과정에 명태 뱃속의 벌레(구데기)는 어찌 처리하고.... 마른 명태는 찾아 볼 수 없다. 내장하고 간은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 다행히 겨울에 명태가 났으니 망정이지.... 이 명태가 우리 서민들을 살렸다, 모든 사람들의 밥상에 맛있는 고기로 오르는 것이다.

명태가 부두에 내려지면 니어커 부대가 줄을 선다. 수협 조합원의 입회하에 흥정이 이루어지 명태는 주인의 건조장으로 간다. 주로 청호동 중간과 초등학교 근처의 넓은 명태 덕장에 나른다. 20여 드럼씩 싣고 덕장으로 내달린다. 헌 니어커를 한 대 사서 한조가 되어 형과 나는 끌고 밀었다. 나는 덩치가 작아 주로 니어커를 밀었다. 아니 끌려 다녔다. 당시에는 제법 돈이 되는 아르바이트이다. 니어커 바퀴살이 스무개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요즈음도 궁금해서 세어보니 스무개이다. 세상이 다 변해도 니어커 살은 변하지 않았으니.... 엇비스듬한 살이 서로 의지하여 바퀴 축을 지탱하는데 하나라도 느슨하면 연쇄적으로 무너진다. 눈길을 미끄러지며 달리고 언 발이 후끈 거리도록 달렸다. 속초의 눈이 우리의 사정을 봐주고 오는 눈인가? 니아까가 빠지던지 발이 빠지던지 이판사판이다. 척박한 환경은 아바이 마을의 자녀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갔다. 동상 걸려 아린 발을 문질러 가면서 청호동을 오르내렸다.

큰 누나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명태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내가 명태 눈알을 바다에 씻어 먹다가 바다에 휩쓸려서 죽다가 산 이야기다. 북진한 미군이 함흥부두로 철수할 때 미군의 마지막 상선을 타고 피난민들, 아니 자유를 찾아 월남한 사람들이 거제도에서 상륙하였다. 엄마도 그때 그 배를 타고 나왔다. 엄마는 포로 수용소 옆에서 만삭된 배로 장사를 하다가 나를 낳았다고 한다. 4월 어느날 출산후 영양실조가 되어 다 죽어가는 엄마와 나를 미군들이 군병원에 입원시켜 살려냈다고 한다. 이렇게 살아난 엄마는 아이들을 데리고 먼 고향 쪽, 이북이 가까운 곳으로 걸어서 몇 달 동안 행상하며, 구걸해 가면서 올라 왔다. 처음 도착한 곳이 지금의 주문진이다. 아직 속초를 수복하지 않았기에 거기가 최전선이었다. 그곳에서 명태 배를 가르는 삯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어느 날 큰 누나가 모래 백사장에 어린 나를 앉혀 놓고 명태 배를 갈랐다. 나는 3살 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는 명태 눈알을 건조하기 전에 빼고서 건조하였다. 수북히 쌓인 눈알들은 바닷물에 씻으면 간식이나 먹거리가 되었다. 한참 명태 배를 가르는데 내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명태 눈알을 씻어 먹으려 바닷가로 내려 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나간 것이다. 당황한 누나가 이러 저리 백사장에서 발을 동동 거리며 찾았다. 그런데 파도에 곤죽이 되어 휩쓸리는 아이 모습을 얼핏 보았다. 무조건 내려가 끌어 안았는데 팔에 무언가 잡혔다. 그게 바로 나였다는 것이다. 흔들어도 기척이 없어 죽은 줄 알고 울다보니 한참 있다가 깨어나더라는 것이다. 천운을 타고 났다. 살아서 할 일이 있었을텐데...... 아직도 산 값을 다 못 했으니....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생명은 엄마에게서 한번, 누나에게 한 번, 거듭 살아서 평생의 빚이 되었다.

겨울에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명태, 전쟁의 후유증에 할 일 없는 사람들을 바다로 내몰게 했다. 그리고 많은 생명을 구했다. 뱃놈이 따로 있나? 먹고 살려고 배타다가 멀미, 뱃속까지 뒤집어져 토하는 경력이 붙으면 뱃놈이지.... 속초가 수복이 되고 우리 집은 함경도 피난민들이 진을 친 청호동으로 왔다. 황량한 판자촌, 난민촌, 미군의 부서진 배와 깡통으로 지어진 집들.... 거기서 살려고 몸부림치던 시절에도 겨울 명태는 언제나 반가운 손님이었다. 알라스카의 붉은 곰에게 연어가 매년 반가운 존재이듯이..... 가난하던 시절, 보리밥에도 명태는 반찬으로 궁합이 맞았고 수제비에도, 꿀꿀이 죽에도 명태는 국이면 국, 찜이면 찜, 어떻게 요리해도 어울렸다.

그러던 어느 해 명태가 흉년이었다. 바다에 따뜻한 물이 흘렸던지 명태 어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통영에서 온 우리 집의 단골 배는 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고향으로 철수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배들도 어획량이 시원치 않았다. 기름 값도 겨우 한다. 배타는 것을 전업으로 하는 청호동 아바이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저들은 터 밭도 없다. 오직 바다만 믿고 산다. 올해도 명태가 잘 나겠지 믿고 여름에 번 돈을 흥청망청 썼다. 그 대가를 받게 되었다. 우리 집도 보통타격이 아니었다. 엄마의 생선장사도 바다에서 고기가 나지 않으니 말이 아니고 배타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 없었다. 우리 외삼촌 세 명은 모두 선장이다. 자식들을 6명씩 낳았다. 8식구가 궁핍할 때는 먹는 것 만해도 벅찼다. 배급품이 나왔다. 미국에서 온 밀가루와 빛바랜 마른 우유이다. 아침에는 수제비, 점심에는 우유를 찐 것인데 너무 딱딱해서 잇몸에 피가 묻어 나오고, 저녁에는 밀가루와 씨레기를 넣은 꿀꿀이 죽, 감자를 썰어 넣던지, 콩가루를 부풀려 넣은 국.... 그나마나 세끼를 다 먹는 집은 양호하다. 정말 어려운 시절 때 미국의 구호물자가 명태를 대신했다. 항상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가 이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 일회용이 아니라 선전용이 아니라 참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이 소식은 나로 하여금 눈물이 나게 한다. 암 도와야지. 있을 때 잘 해야지.......

어느 날 엄마는 아끼는 세 동생(외삼촌들) 집을 염탐하고 오라고 나에게 지시했다. 큰 외삼촌 집에 갔다. 초저녁인데 식구들이 다 누웠다. 일렬로, 차례대로.... 외숙모, 큰 딸 월천이, 월옥이, 아들 상일이.... 그런데 누운 폼이 잠을 자는 것이 아니다. 며칠째 먹지 못해 지쳐 누운 것이다. 둘째 외삼촌 집에도 가보았다.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6명이 다 누웠다. 막내 외삼촌 집에도 가보았다. 거기도.... 엄동설한에 불도 땔 나무도 없다. 춥고 배고프고.... 이웃에도 제대로 먹는 집이 없었다. 눈이 쑥 들어가고 그야말로 사흘에 피죽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한 얼굴로 다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엄마에게 와서

“엄마! 다 굶어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것 같아. 다 누웠어. 벌벌 떠는 것 같아. 눈만 껌벅이는 것 같아....” 본 대로 말했다.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동생들이 이 객지에 와서까지 굶어 죽다니.... 어디에 숨겨 두었는지 부지런히 장사해서 모아둔 돈을 풀어 밀가루와 쌀을 샀다. 그리고 우리 누나들과 형과 내가 고생하며 울산바위 밑까지 가서 해온 땔감나무들을 외삼촌 집에 갔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우리 형제는 “우리도 제대로 못 먹는데....엄마는 동생들 밖에 몰라....”

가난이 주는 불평이었다. 희소가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두덜대면서도 가져다 주었다. 엄마는 어느 날 나에게 말하신다. “너를 업고 피난길에 밥을 얻으려 가면서 문전박대를 받던 중 어느 집에 가니 밥을 딱 한 숟가락을 떠서 바가지에 담아 주더라. 네가 내 뒤에 엎혀서 손을 뻗치면서 그 밥을 홀랑 집어 입에 넣더라. 너도 남을 도와주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엄마에게서 받은 평생 교훈이 되었다.

명태는 가끔은 저를 믿고 사는 아바이 마을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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