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초딩추억시리즈27-실향민을 먹여살린 오징어

6,517 2011.06.0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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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성이 잦아든 속초항은 천혜의 항구이다. 이 항구는 석호인 청초호를 청호동이 바다 쪽에서 잘 막아 주기에 어떤 풍랑에도 안전한 항구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휴전선 턱 밑인 속초로 몰려왔다. 헤어진 형제 자매, 처, 애인, 친구 등 이산가족을 찾아 모여 들었다. 다닥다닥 덧붙여 지어진 하꼬방. 통일이 되면 미련없이 버리고 갈 임시 거처이기에 춥고 덥고 불편해도 타향살이를 감내하며 살았다. 그들 모두를 이 타향에서 살린 것은 겨울의 명태와 여름의 오징어잡이였다. 피난민만 아니라 타지 사람들도 겨울과 여름에 속초로 몰려 왔다.

오징어.... 생긴 모양은 둥근 원통에 원추형으로 로켓처럼 생겼고 다리위에 머리가 함께 달린 바다의 괴물이다. 육지 사람들은 오징어가 이등변 삼각형을 두 개 겹쳐 놓은 듯하고 밑에 다리가 달린 양 그렇게 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시중 건조된 오징어는 배를 갈라놓은 것을 말린 것이다.
오징어는 원래 학명으로는 두족강, 이새아강으로 분류되며 발이 10개 꼴두기목으로 나눠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참오징어, 무늬오징어, 쇠오징어, 화살꼴뚜기, 창꼴뚜기, 귀꼴뚜기 등이 난다. 그 중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피둥어 꼴뚜기를 흔히 오징어라고 부른다.

어려서부터 여름이면 이런 오징어만 보아 와서 오징어는 다 동해안 오징어로 안다. 5월 말쯤이면 꽁치가 알을 해초에 낳는다. 바다에 떠다니는 부유물에는 다 알을 붙인다. 해초는 육지 식물과 달라 늦가을부터 자라서 겨울이면 울창하고 봄이면 바위에서 떨어진다.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해초 중 물에 뜨는 것들이 있다. 이때를 놓칠 새라 꽁치가 알을 놓고 이 꽁치를 먹으려고 오징어가 해류를 타고 육지 근처까지 먼 바다에서 온다. 먹이사슬의 순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6월 말이되면 ‘꽁치잇까’라고 하는 오징어 새끼들이 잡히기 시작한다. 이 오징어 잡이는 속초에 있는 배를 선두로 시작되고 육지는 오징어 건조 준비로 흥분되기 시작한다. 말뚝(고랑대)을 박고, 덕장을 만들고, 지붕 위에도 이중 삼중으로 건조장을 만들고, 축항은 매년 자리를 잡아온 영유권 분쟁이 시작된다. 방파제 숨구멍에 맞는 고랑대를 선점하여 박아 넣는다. 바람구멍을 막으면 방파제에 무리가 가는데도 무식이 충만한 생존경쟁을 벌린다. 그리고 새끼줄로 된 줄을 삼단, 사단으로 맨다. 그리고 오징어를 할복하여 새끼줄에 넌다. 다 말려 상품이 되기까지 날씨가 좋으면 4-5일 걸리고 나쁘면 일주일이 더 걸린다. 수 없이 많은 오징어 건조장, 청호동 백사장은 물론이고 방파제, 심지어 파도가 들락거리는 해변까지 건조장이다.

오징어를 잡기 위해 각 지역에서는 배들이 몰려온다. 요즈음은 어업권이 각 도별로 분류되어 있다. 타지 배들은 구역을 넘으면 위법이지만 옛날에는 그런 구분이 없어 전국 각지의 배들이 고기가 잡히는 장소로 몰려 다닌다. 오징어를 많이 잡아 팔면 되는 시대였다.
어릴 때 배들이 나가는 소위 러시아워를 구경하는 일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었다. 수백 채의 배가 한정된 시간에 청초호를 빠져 나가야 하기에 생존경쟁의 전쟁터이었다. 대체로 배 나가는 시간은 오후 2시-4시이다., 즉 밤새 작업을 끝내고 들어온 선원들이 낮잠을 자고 점심을 먹고 나면 배가 있는 곳으로 어구를 챙기고 승선한다. 여분의 오징어 채낙시 도구, 복어 잡을 낙시, 장대, 산자꼬(오징어를 흔들어 잡는 가장 간편한 어구), 저녁 도시락, 비옷은 필수이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오징어가 내 뿜는 물세례를 막는 길은 비옷이고 발이 물리지 않기 위해 장화도 필수이다. 승선 명단을 작성하고 각 배의 사무장은 해양 파출소에 조업 허락을 받기 위해 뛰어 다닌다. 허가 받은 배는 줄을 풀고 바다로 나간다. 얼마나 많은 배가 한꺼번에 나가는지 청초호 호수의 입구는 항상 병목현상이 일어난다. 질서대로 나가면 한 두시간 안에 다 나갈 수 있지만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바다로 나가는 전쟁터에서 양보가 있는가? 통통거리는 배, 배들끼리 부딪히는 소리, 욕설과 싸우는 소리, 고함과 비명소리... 당시 속초항은 볼거리 없는 우리에게는 인생극장이었다.

초창기(50년도)에는 오징어 잡는 방법은 배들이 전부 ‘돈보’를 썼다. 돈보는 오징어를 잡는 도구로 납을 녹여서 20센티미터의 나무나 사기에 입히고 활처럼 휜 놋쇠로된 철사로 양가닥을 잡는다. 납에서 30센티미터 끝에 3개의 낙시를 단다. 그러니까 6개의 낙시가 달리는데 그 낙시는 검정 비로도 천을 감싼다. 비로도가 깜깜한 바닷물에서 흔들면 야광이 난다. 이 야광을 보고 오징어가 달려든다. 번적 거리는 것을 보고 달려들기는 오징어나 사람이나 같다고나할까? 오징어 숫자도 엄청 많았고....

60년대에는 몸체에 전지를 달아 물속에서 오징어를 유인해서 잡았다. 그리고 배 전체가 동력화되면서 밤에 불을 밝혀 오징어를 유인하여 잡았다. 경쟁이 너무 심하여 작은 배라도 무려 5만 촉광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 후유증으로는 뱃사람들의 시력을 약화 시켰고, 여름에는 무척이나 더워 시원한 바닷 바람이 불더라도 땀이 비오듯한다. 밤새껏 전동기를 돌리는 엔진소리는 귀를 멍멍거리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피부를 건조하게 하고 낮에 잠을 자도 비몽사몽하게 만들었다. 후유증이 컸다. 배타는 일이나 광부 일이나 다 인생막장에서 택한 직업인데 그 정도도 감수해야지.... 요즈음 EBS에서 ‘극한 직업’ 시리즈를 방영하는데 오징어 뱃사람들의 고된 작업과 애환을 보여 주어서 옛날 오징어 배의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방영된 그 이면의 아픔은 실제 경험한 사람만의 몫일 것이다.

70년대에는 오징어 잡이에도 혁신의 바람이 불어 왔다. 어업에서는 일본이 선구자로서 로라와 채낙기 낙시를 여러 개씩 달아서 쓰는 법이 생겼다. 제일 아래는 추돌을 달고 6-70센티 간격으로 경심 18호에 5개의 오징어 낙시를 달고, 그 위에 20호에 5개, 22호 5개, 24호 5개, 26호 5개, 28호까지 총 25개-30개의 낙시를 단다. 제일 마지막 낙시 위에 30호 이상의 원줄 30-50미터를 감고 수심 150-200미터 깊이로 오징어가 있는 밤바다를 공략한다.

오징어가 잡히는 수심은 다 제 각각이다. 어느 지점에서 잘 물린다는 대안은 없지만 대체적으로 초저녁(6-7시)은 깊은 수심에서 채인다. 어두워지면 차차 오징어가 물위로 불빛을 보고 떠오른다. 해가 넘어갈 때부터 어두워질 시점에는 꼭 한 떼의 오징어가 몰려 온다. 그 시간은 저녁밥을 먹을 시간인데 먹다가도 비상이 걸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경험 많은 사람들은 부지런히 밥을 먹고 바다에 로라를 담가서 위 아래로 풀기도 하고 감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 시간에 지나가는 오징어를 몽땅 거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오징어는 어떤 한 사람의 낙시에 채이면 그 걸린 오징어를 따라 그 밑의 낙시를 계속 무는 성향이 있다. 얄미울 정도로 처음 오징어를 거는 사람이 더 많이 잡는다. 한 마디로 선수를 쳐야한다. 부지런히 쉴 사이 없이 로라를 감았다 풀었다 해야 한다. 언제 물지 모르기 때문이다. 참 고된 직업이다. 초저녁 6시부터 먼동이 틀 아침 5시까지 11시간 쉬지 않고 일하는 고된 작업이다.
일찍 잡힌 오징어는 그 후에 밥을 먹는 사람들의 횟감이다. 바다에서 살아있는 오징어를 먹는 맛이 무엇과 비교될 수 있을까? 횟집 수족관에 죽을 시간을 기다리는 금식한 생선에 비하랴. 뱃사람들은 그 맛 때문에 배를 탄다고 스스로 위로를 한다. 때로 가짜 프라스틱으로 만든 호리개를 사용하여 떠있는 오징어를 잡기도 한다. 오징어는 밤에 간혈적으로 떼로 몰려 오지만 대체로 밤 10시 전에 한두 차례, 새벽 2시 지나서 한 두 차례, 그리고 선원들이 졸음에 지처서 간판 위나 선실에 들어가 들어 누울 때 부지런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밤을 지새우는 사람을 위해 몰려 올 때가 있다. 그리고 새벽 동이 트기전에 마지막 공세가 이루어 진다. 각자의 어획량은 역시 심는 대로 거둔다.

80년대부터 바다의 오징어 양이 많이 줄었다. 초저녁에 나가서 그 다음날 잡아서 들어오는 근해조업이 아니었다. 그래서 배는 더 크게, 집어등은 더 많게, 밝게, 바다는 더 멀리... 며칠씩 나가서 잡게 되었다. 한번 나가면 15일 이상의 원양어업을 하게 되었고 동해안에서 러시아 앞바다까지 그 영역이 넓어졌다. 오징어 잡는 사람들의 숫자도 점점 줄어 들었다. 그리고 80년 말에는 오징어 잡이도 자동화 되면서 정예 선원만 태우고 조업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오징어가 정말 많이 잡혔다. 초롱불 밝히며 밤새 잡은 오징어가 더 싣을 데가 없어 들어 온다고 한다. 얼마나 많이 잡히면 그럴까? 여름 아침에 부두가나 판장에 나가면 온통 오징어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비오는 날에는 미처 처리를 못한 오징어는 청초호 행이다. 지금처럼 환경 단체가 있어 통제하고 여론이 있어 말하겠는가? 단지 산다는 것으로 통하던 시대이다. 온 호수가 썩은 오징어 냄새로 진동을 한다. 때를 만난 갈매기들은 환희의 울음으로 항구를 시끄럽게 한다. 포식하여 날지 못해 떠다니는 갈매기도 여름 먹거리 축제를 즐긴다.

우리 아이들은 매번 아빠의 휴가가 속초라고 불만을 터트린다. 그러면 나는 “야 휴가가 너네 휴가냐 아빠 휴가지?” 말도 안되는 독선으로 밀어 부친다. 속초에 들어와 청호동에 들어서면 둘 다 코를 막는다. 아니 아내까지 셋이.... 설악산을 통과하며 품고 온 차안의 공기가 오염될까 창문을 닫는다. 그러면 나는 “지금 이게 무슨 냄새냐, 옛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유별 떠느냐”고 한 마디를 한다. 그러면 뒤에서 “이게 사람들이 살 곳이냐고....” 쫑알 거린다. 속으로 ‘그래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생명이 있어 산 것 뿐이야’ 일전에 여수에 갈 일이 있어 여천 공단을 통과하는데 그 화학공장의 냄새가 너무 역하여 창문을 닫았다. 나도 같은 말을 했다. “이게 사람이 살 곳이냐고....” 곧 이어 ‘아차 나도 별 수 없구나’. 그래 그 냄새가 가난하던 한국을 살린 것이 아닌가? 그 냄새를 감내하고 여기 사는 사람도 있는데.....
어릴 때 여름에 속초에 오징어 썩는 냄새가 나는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오징어가 냄새가 피난민을 살렸다. 수만명을 먹여 살렸다. 오징어 잡는 사람도 살리고, 건조해서 파는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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